일본 문화 상식
니노미야 긴지로(二宮近次郞)
반드라스
2008. 2. 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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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6의 학교에 가자의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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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일본의 초등학교에서는 어디에도 있는 석상입니다.
니노미야 손토쿠(니노미야 긴지로)입니다.
니노미야 손토쿠(니노미야 긴지로)입니다.
그는산에 나무를 베러 가는 길에서도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니노미야 손토쿠(1787년 9월 4일)
"보은 사상"을 주창해 농촌 부흥 운동을 지도한 사상가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유명하지만 정한론자(征韓論者)로도 유명하죠. 이 사람 동상을 일본 전국과 한국 전국의 초등학교 교정에 세웠는데 태평양 전쟁 말기에 구리(銅)가 모자라자 이 동상을 녹여서 사용함으로 해서 없어졌다고 하죠. 이후 일본에서는 학교에 동상을 세우는 풍습이 없어졌는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동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학교에다 동상을 세우는 것은 이 사람의 동상이 유래가 된 건데 아직 그걸 버리지 못하는 한국입니다. 征韓論者로서의 그는 대단히 적극적이고 맹렬한 사람이었어요. 일본으로서는 훌륭한 사람이겠지만 한국에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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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
정한론은 일본의 근대화 시기의 논리라고 할수 있는데요.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한창 근대화 작업을 할때 일본의 정치 세력은 두개로 나눌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새로운 흐름에 맞추어서 발빠르게 국제 정세를 인식한 정치 세력인 조슈파.. 그 출신지역이 대부분 조슈 번 지역 인사들이라 그렇게 불리웠죠.
그리고 막부 체제의 다이묘 하급 무사들이 주축으로 달라진 정세에 적응을 못해서 큰 손해를 입은 세력들로써 강경파라고 부릅니다.
당시 모습은 메이지 유신을 이끄는 무쓰이토 일왕의 친위 세력인 근대화 관료세력인 조슈파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파인 강경파의 대립이라는 겁니다.
이때 무쓰히토 일왕은 1871년에 이와쿠라를 전권대신으로 삼아 각 방면에 소질있는 50여명을 모아서 외국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고 공부해 오라는 의미로 구미 시찰단을 보냅니다. 이때 전권대신 이와쿠라를 수행하는 부사가 30세의 젊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이렇게 일왕 친위 세력이 정부를 떠난 사이 정부에는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고 그들은 내부의 보수적인 계층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보수세력의 주요 계층은 무사계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입니다.
이후 정한론의 주동자인 사이고가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거의 끝내고 운요호 사건 등을 일으켰을때 이와쿠라 등 해외를 살피고 돌아온 사절단이 2년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사절단은 정한론을 반대하게 되는데 이유는 아직 외국을 넘볼 정도로 국력이 튼튼하지 못하니까 나라안의 내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사이고가 중심인 정한파와 이와쿠라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맞서자 일왕 무쓰히토는 친위파인 이와쿠라의 손을 들어 주게 되고
불만을 품은 사이고와 정한파가 관직을 모조리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1년 동안 계속된 이 반란으로 사이고 일파는 전사, 체포 도는 자살함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세이난 전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조슈파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 세력은 더욱 결집하게 되었고 이는 1881년에 자유당 창당으로 이어집니다.
자유당과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게 되자 일본은 부국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수 없었고 강병은 무사들의 특권을 뺐는다 해서 보수파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부국을 기치로 조금씩 타협하며 강병을 이루어서 결국엔 해외 식민지를 무력으로 뺏어서 부국을 이루어야 하는 즉, 조슈파와 보수파가 모두 만족하는 군국주의로 가게 됩니다. 정한론은 이때와서 비로소 일본의 기본 정치 이념이 됩니다.
이러한 정치 방향을 이끈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 입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한창 근대화 작업을 할때 일본의 정치 세력은 두개로 나눌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새로운 흐름에 맞추어서 발빠르게 국제 정세를 인식한 정치 세력인 조슈파.. 그 출신지역이 대부분 조슈 번 지역 인사들이라 그렇게 불리웠죠.
그리고 막부 체제의 다이묘 하급 무사들이 주축으로 달라진 정세에 적응을 못해서 큰 손해를 입은 세력들로써 강경파라고 부릅니다.
당시 모습은 메이지 유신을 이끄는 무쓰이토 일왕의 친위 세력인 근대화 관료세력인 조슈파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파인 강경파의 대립이라는 겁니다.
이때 무쓰히토 일왕은 1871년에 이와쿠라를 전권대신으로 삼아 각 방면에 소질있는 50여명을 모아서 외국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고 공부해 오라는 의미로 구미 시찰단을 보냅니다. 이때 전권대신 이와쿠라를 수행하는 부사가 30세의 젊은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이렇게 일왕 친위 세력이 정부를 떠난 사이 정부에는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었고 그들은 내부의 보수적인 계층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보수세력의 주요 계층은 무사계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입니다.
이후 정한론의 주동자인 사이고가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거의 끝내고 운요호 사건 등을 일으켰을때 이와쿠라 등 해외를 살피고 돌아온 사절단이 2년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사절단은 정한론을 반대하게 되는데 이유는 아직 외국을 넘볼 정도로 국력이 튼튼하지 못하니까 나라안의 내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사이고가 중심인 정한파와 이와쿠라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맞서자 일왕 무쓰히토는 친위파인 이와쿠라의 손을 들어 주게 되고
불만을 품은 사이고와 정한파가 관직을 모조리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1년 동안 계속된 이 반란으로 사이고 일파는 전사, 체포 도는 자살함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세이난 전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조슈파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 세력은 더욱 결집하게 되었고 이는 1881년에 자유당 창당으로 이어집니다.
자유당과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게 되자 일본은 부국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수 없었고 강병은 무사들의 특권을 뺐는다 해서 보수파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부국을 기치로 조금씩 타협하며 강병을 이루어서 결국엔 해외 식민지를 무력으로 뺏어서 부국을 이루어야 하는 즉, 조슈파와 보수파가 모두 만족하는 군국주의로 가게 됩니다. 정한론은 이때와서 비로소 일본의 기본 정치 이념이 됩니다.
이러한 정치 방향을 이끈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 입니다.